불과 고기 사이에 숨은 500년의 각주

미국인들이 바베큐를 할 때마다 콜럼버스를 기념하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6세기 카리브해 원주민의 ‘바르바코아’에서 시작된 이 요리법이 지금은 텍사스 남자들의 자존심이 되었으니, 문화 전파라는 게 참 신기하다.
원래 바베큐는 생존 기술이었다. 고기를 오래 보존하려면 훈제를 해야 했고, 나무 구조물 위에서 천천히 익히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게 ‘취미’가 되었다. 주말마다 마당에서 온도계를 들여다보며 “내 브리스킷이 최고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인간의 진화 방향이 조금 이상한 것 같기도 하다.
노예제도가 만든 맛
미국 바베큐 역사에서 가장 불편한 진실은 노예제도와의 연관성이다. 아프리카 노예들이 원주민 기법과 자신들의 요리법을 결합해서 지금의 남부 바베큐를 만들었다. 억압받는 사람들이 만든 음식이 지금은 미국 문화의 자랑거리가 되었다는 아이러니. 역사는 이런 식으로 포장된다.
19세기 정치인들은 바베큐 파티로 표를 모았다. 큰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구워주면 유권자들이 기분 좋게 투표해줬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이제는 선거 공약 대신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어필한다.
프랭크 언더우드의 선택
넷플릭스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 프랭크 언더우드가 자주 찾는 ‘Freddy’s Ribs’는 캐롤라이나 스타일이다. 권력자가 뒷골목 BBQ집을 찾는다는 설정 자체가 미국적이다. “나는 서민의 마음을 안다”는 정치적 제스처를 갈비 한 접시로 표현하는 셈이다.
드라마에서는 가상의 가게지만, 실제 촬영에 쓰인 갈비는 워싱턴 D.C.의 Federalist Pig에서 가져왔다. 가짜 가게의 진짜 음식이라니, 이것도 미디어의 묘한 지점이다.
서울에서 찾는 텍사스의 향수
한국에서도 미국식 BBQ를 먹을 수 있다. 이태원의 Linus’ Bama Style BBQ, 종로의 About Jin’s BBQ, 평택의 Smoke Town BBQ까지. 미군기지 주변에 특히 많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향수는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미국식 BBQ집도 있다. 현지 재료로 텍사스 맛을 재현하려는 시도는 나름 진지하다. 물론 정작 텍사스 사람들이 먹어보면 “이게 뭐야?“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노력은 인정해줘야 한다.
불과 시간의 경제학
진짜 바베큐는 225도에서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한다. 패스트푸드 시대에 이런 슬로우푸드가 인기라는 것도 흥미롭다. 바쁜 사람들이 일부러 느린 음식을 찾는다. 역설적이지만 이해는 된다. 기다림 자체가 사치가 된 시대니까.
주말마다 그릴 앞에서 맥주를 마시며 온도를 체크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들이 정말 원하는 건 고기가 아니라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뭔가를 한다는 느낌을 주는 완벽한 핑계다.
바베큐는 결국 기다림의 미학이다. 불을 지피고, 고기를 올리고, 몇 시간 동안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 현대인들이 바베큐에 열광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불과 고기 사이에는 500년의 역사가 숨어있다. 그 역사를 모르고 먹어도 맛있지만, 알고 먹으면 조금 더 복잡한 맛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