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자의 부적

무신론자의 부적

친구가 또 아이패드를 샀다. "이번엔 진짜 그림 그릴 거야." 작년 이맘때는 와콤 타블렛이었다.

현대인의 도구 구매를 보면 재밌는 패턴이 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물건은 믿는다. 맥북의 생산성, 몰스킨의 아날로그 감성, 다이슨의 청소 의지. 무신론자의 부적이다.

믿음의 대체재

종교가 약해진 시대, 우리는 다른 곳에서 희망을 찾는다. 교회 대신 애플스토어, 기도 대신 결제, 은총 대신 프라임 배송.

부적이 액운을 막아준다고 믿듯이, 우리는 도구가 게으름을 막아줄 거라고 믿는다. 성수 대신 언박싱 영상, 축복 대신 리뷰. 구매 버튼을 누르는 순간이 가장 신성하다.

주술의 메커니즘

무신론자의 부적은 이렇게 작동한다:

단계 1: 계시
유튜브 알고리즘이 보여준다. "이 도구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단계 2: 신앙고백
"맞아, 내가 못하는 건 도구가 없어서였어"

단계 3: 헌금
카드번호 입력. 할부는 3개월.

단계 4: 성체배령
택배 수령. 포장지 뜯기. 잠시나마 구원받은 기분.

단계 5: 현실
일주일 후. 도구는 서랍에, 신앙은 다음 제품에.

비합리적 합리성

재밌는 건, 우리 모두 이게 미신이라는 걸 안다는 거다. 도구가 나를 바꾸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산다.

왜? 아마도 믿고 싶어서. 변화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포기할 수 없어서. 신이 없는 세상에서도 기적은 필요하니까.

그래서 우리는 도구를 산다. 부적처럼, 성물처럼, 희망의 증거처럼.

효험

가끔은 정말 영험하다. 비싼 자전거를 사고 정말 라이더가 된 사람, 맥북을 사고 정말 개발자가 된 사람. 무신론자의 기도가 응답받는 순간.

물론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괜찮다. 부적의 효능은 효과가 아니라 위안이니까. 뭔가 하고 있다는 느낌, 시도하고 있다는 위안.

건전한 미신

무신론자의 부적과 건강하게 지내는 법은 간단하다.

미신임을 인정하되, 즐기기. 효과를 기대하되, 의존하지 않기. 가끔은 정말 영험할 수도 있다고 믿기.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많이 사지 않기.

부적도 너무 많으면 충돌한다고 하지 않던가.


오늘도 봤다. 스타벅스에서 새 맥북 언박싱하는 사람. 경건한 표정이었다.

이해한다. 나도 어제 몰스킨 주문했으니까.

무신론자에게도 믿음은 필요하다.

심지어 그게 노트북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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