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가 시장을 만든다
우리는 연결되기 위해 앱을 깔았다. 그런데 더 외로워졌다. 효율을 위해 스와이프했다. 그런데 더 지쳤다. 이건 역설이 아니다. 필연이었다.
디지털 시대가 약속했던 초연결 사회는 실패했다. 정확히는 성공했지만 잘못된 방식으로 성공했다. 틴더(Tinder)는 사람을 만나는 문턱을 낮췄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을 상품으로 만들었다. 스와이프 한 번에 누군가를 평가하고, 스와이프 한 번에 누군가에게 거절당한다. 이 과정이 10번, 100번, 1000번 반복되면 어떻게 될까. 피곤해진다. 정서적으로 소진된다. 결국 앱을 지운다.
이게 2020년대 중반의 풍경이다. 스와이프 문화(Swipe Culture)에 대한 집단적 환멸. 그리고 그 환멸이 만든 새로운 시장.
타임레프트(Timeleft)라는 서비스가 있다. 사진이 없다. 프로필에 얼굴을 올리지 않는다. 대신 성격 테스트를 한다. 그리고 알고리즘이 당신을 낯선 사람들과 매칭해서 저녁 식사 자리를 잡아준다. 당신은 그냥 나타나기만 하면 된다.
이 서비스는 14개월 만에 연간 반복 매출(ARR) 1,000만 유로를 찍었다. 데이팅 앱이 아니라고 한다. 그냥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서비스라고 한다. 근데 사람들은 이게 필요했다. 스크린이 아닌 현실에서의 만남. 평가받지 않고 그냥 앉아서 밥 먹는 경험.
피로도는 비즈니스의 시작점이다. 사람들이 지쳤다면, 그게 기회다.
데이오브어스(DayOfUs), 스트레인저스(Strangrs) 같은 서비스들도 비슷한 맥락이다. 모두 같은 피로를 공략한다. 선택의 피로. 의사결정의 피로. 거절의 피로. 이 서비스들은 그 피로를 제거한다. 식당을 예약해주고, 사람을 매칭해주고, 대화 주제까지 준비해준다. 사용자는 "나타나기(Show up)"만 하면 된다.
외로움은 이제 산업이다. 2030년까지 5,00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외로움 경제(Loneliness Economy). 이름부터 씁쓸하다. 근데 현실이다.
사회적 고립은 하루 담배 15개비와 맞먹는 건강 위험이라고 한다. 의료비가 증가하고, 기업 생산성이 떨어지고, 사람들은 더 아프다. 이 고통을 해결하려는 시장이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AI 컴패니언으로 인간관계를 대체하는 방식. 다른 하나는 실제 인간을 연결해주는 방식.
장기적으로 보면 후자가 이긴다. 사람은 결국 사람을 원한다. AI와 대화하는 건 임시방편이다. 진짜 필요한 건 옆에 앉아서 밥 먹고 웃을 수 있는 누군가다. 타임레프트가 성공한 이유도 여기 있다. 기술로 외로움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기술로 만남을 촉진한다.
피로는 여러 층위에서 작동한다. 스와이프의 피로. 고립의 피로. 의사결정의 피로. 그리고 생애 전환기의 피로.
이혼했다. 은퇴했다. 이사했다. 기존의 관계망이 끊긴다. 새로 시작해야 한다. 근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데이팅 앱을 깔기엔 부담스럽다. 동호회에 가기엔 용기가 없다. 그냥 집에 있는다. 외롭다. 지친다.
생애 전환기의 피로는 재사회화의 진입 장벽이다. 이 장벽을 낮춰주는 게 비즈니스가 된다.
황혼 이혼(Grey Divorce)이 늘어난다. 기대 수명이 늘어나면서 50~60대에 새 출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이들은 타임레프트의 핵심 고객층이다. 프로필 사진 없이, 가벼운 부담 없이, 그냥 식사하면서 사람을 만난다. 안전하다. 구조화되어 있다. 예측 가능하다.
타임레프트의 창업자 막심 바비에(Maxime Barbier)는 "남은 시간(Time Left)"을 계산하면서 이 서비스를 만들었다고 한다. 인생이 유한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스크린 앞에서 스와이프하는 대신 실제로 사람을 만나기로 했다.
이게 핵심이다. 피로는 신호다.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신호. 그리고 그 신호를 포착하는 사람이 시장을 만든다.
디지털 과잉 연결의 피로는 오프라인 기술(IRL Tech)을 낳았다. 고립의 피로는 외로움 경제를 만들었다. 관계 맺기의 번거로움은 큐레이션 된 소셜 다이닝 모델을 탄생시켰다. 패턴이 보인다. 피로가 쌓이면 시장이 생긴다.
미래의 성공적인 비즈니스는 시간을 빼앗는 게 아니라 시간을 돌려준다. 관계를 파편화하는 게 아니라 관계를 회복시킨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기술이 인간을 연결한다.
결국 우리가 파는 건 서비스가 아니다. 회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