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튀김의 각주

감자튀김의 각주

감자튀김에 10가지 스타일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잠시 멈칫했다.

Standard Cut, Natural Cut, Steak Fries, Curly Fries... 이게 다 필요한 건가? 그냥 감자를 썰어서 기름에 튀기면 끝 아닌가? 하지만 맥도날드가 전 세계 어디서나 똑같은 직선 모양을 고집하고, Arby's가 나선형으로만 승부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모양이 브랜드가 되는 순간

Chick-fil-A(칙필레이)는 와플 모양 감자튀김으로 유명하다. 격자 구멍에 소스가 잘 묻어나서? 그런 기능적 이유도 있겠지만, 진짜는 따로 있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차별화 전략이니까.

한국에서도 비슷하다. 브뤼셀프라이가 백화점 팝업으로 등장할 때 내세운 건 "벨기에식 두꺼운 컷"이었다. 감자는 똑같은 감자인데, 썰기만 다르게 해도 프리미엄이 된다.

이름의 정치학

프랑스에서는 French Fries라고 안 부른다. 당연하다. 자기 나라 음식을 굳이 "프랑스식"이라고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들은 그냥 "Frites"라고 한다.

영국에서는 Chips다. 미국에서 Chips라고 하면 바삭바삭한 과자를 연상하지만, 영국에서는 두툼한 감자튀김이다. 같은 영어권인데도 이렇게 다르다.

이름 하나에도 문화적 자존심이 스며있다. 벨기에 사람들은 감자튀김이 자기네가 원조라고 주장하고, 프랑스 사람들도 똑같이 주장한다. 17세기부터 시작된 이 논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서울의 감자튀김 지도

신기한 건 서울에서도 이 모든 스타일을 다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맥도날드의 Standard Cut은 기본이고, 신촌 폼프리츠에서는 나선형 Curly Fries를, 광화문 바스버거에서는 와플 모양을 맛볼 수 있다.

포테이토333 같은 로컬 브랜드는 "자연 컷"이라는 이름으로 차별화를 시도한다. 껍질을 그대로 두고 손으로 자른 듯한 투박함을 파는 거다.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낸 것보다 더 "진짜" 같아 보이니까.

10가지 스타일의 속사정

결국 이 모든 스타일은 하나의 질문에 대한 서로 다른 답이다: "어떻게 하면 감자튀김으로 더 많이 벌 수 있을까?"

  • 얇게 썰면(Shoestring) 바삭해지지만 빨리 식는다
  • 두껍게 썰면(Steak Fries) 오래 따뜻하지만 익히기 어렵다
  • 나선형으로 만들면(Curly) 시즈닝이 잘 붙지만 만들기 복잡하다
  • 와플 모양으로 하면(Waffle) 소스가 잘 묻지만 기름이 많이 든다

각각의 장단점이 곧 타겟 고객이 된다. 패스트푸드점에서는 빨리 나가야 하니 얇게, 펍에서는 맥주 안주로 오래 먹어야 하니 두껍게.

감자 하나의 무한변주

생각해보면 참 묘하다. 감자라는 똑같은 재료로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니. 모양만 바꿨을 뿐인데 브랜드가 되고, 가격이 달라지고, 고객층이 나뉜다.

이게 마케팅의 본질이 아닐까. 본질은 그대로 두고 형태만 바꿔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 감자튀김의 10가지 스타일은 사실 마케팅의 10가지 접근법이었던 셈이다.

다음에 감자튀김을 먹을 때는 한 번 살펴보자. 이 모양이 우연히 이렇게 된 게 아니라, 누군가 치밀하게 계산해서 만든 결과라는 걸.

서울에서 만나는 10가지 스타일

직선파 (Standard Cut)
맥도날드는 말할 것도 없고, 롯데리아도 비슷하다. 시청 근처 맥도날드 1호점에서 먹는 감자튀김은 1988년과 똑같은 모양이다.

자연파 (Natural Cut)
포테이토333은 평택이 본점이지만 서울 배달도 된다. 껍질 그대로 둔 투박함이 매력. 홍대 근처 수제버거집들도 이 스타일을 선호한다.

두껍파 (Steak Fries)
신세계백화점 본점 지하에서 간헐적으로 볼 수 있는 브뤼셀프라이. 벨기에식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냥 두껍게 썬 것. 그래도 맛있다.

나선파 (Curly Fries)
신촌 폼프리츠가 유명하다. 대학생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시즈닝 때문이 아니라 인스타그램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실처럼 얇은파 (Shoestring)
쉐이크쉑 강남점. 얇고 바삭해서 맥주 안주로는 최고지만 혼자 먹기엔 너무 짜다.

와플파 (Waffle Fries)
바스버거 광화문점의 시그니처. 격자 구멍에 케첩이 고여서 한 번에 많이 묻혀 먹을 수 있다.

물결파 (Crinkle-Cut)
브루클린더버거조인트 을지로점. 칙필레이가 없는 서울에서 비슷한 바삭함을 느낄 수 있는 곳.

고구마파 (Sweet Potato)
이태원 오일프라이드집이나 성수동 수제버거집들에서 건강 옵션으로 등장. 단맛 때문에 호불호가 갈린다.

쐐기파 (Wedges)
KFC는 전국 어디나 있다. 치킨보다 감자가 더 맛있다는 소문이 있지만 아무도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

원통파 (Tater Tots)
청년다방 홍대점의 버터갈릭 감자튀김. 소닉이 없는 서울에서 비슷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마요네즈 권유

이 모든 가게를 다니면서 발견한 건, 사실 요즘은 소스 선택권이 꽤 다양하다는 점이다. 마요네즈, 케첩, 갈릭 아이올리, 허니 머스타드까지.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마요네즈만 찾는다.

한국에서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십상이지만, 사실 이게 더 원조에 가깝다. 벨기에에서는 감자튀김에 마요네즈가 기본이다. 프랑스도 마찬가지. 감자튀김의 본고장에서는 모두 마요네즈를 쓴다.

미국이 케첩을 표준으로 만들어버렸을 뿐이다. 단맛 나는 토마토 소스가 감자의 고소함과 어울린다고? 글쎄. 마요네즈의 고소함이 감자와 훨씬 잘 어울린다. 벨기에 사람들이 몇백 년간 그렇게 먹어온 데는 이유가 있다.

케첩이라는 소스 자체가 싫다. 인공적으로 단맛을 낸 토마토 소스라니. 토마토 본연의 맛도 아니고, 설탕 덩어리 같은 그 단맛이 모든 음식의 맛을 망친다. 마요네즈는 최소한 정직하다. 달걀과 기름의 만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10가지 스타일, 서울 어디든 다 있다. 소스 선택권도 예전보다 훨씬 늘었다. 그럼에도 대부분 사람들은 여전히 케첩부터 찾는다.

Read more

케이트라나다가 혼자 춤추는 법

케이트라나다가 혼자 춤추는 법

케이트라나다(Kaytranada)가 처음으로 혼자 앨범을 냈다. 'Ain't No Damn Way!' 피처링 아티스트가 한 명도 없다. 재밌는 건 타이밍이다. 모두가 콜라보에 목매는 시대에 혼자 서기를 택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feat. 누구누구"가 붙어야 조회수가 나온다고 속삭인다. 스포티파이는 협업 플레이리스트를 권한다. 그런데 케이트라나다는 혼자다. NME는 "

By 주중몽크
인터넷에서 건드리면 안 되는 것들: 취향 전쟁의 지뢰밭

인터넷에서 건드리면 안 되는 것들: 취향 전쟁의 지뢰밭

누군가 레딧에 "5만원 와인도 충분히 맛있다"고 썼다가 댓글 300개가 달렸다. 대부분 "와인을 모르시네요"로 시작하는 친절한 교육이었다. 인터넷에서 글 쓰다 보면 깨닫는다. 건드리면 안 되는 성역이 있다는 걸. 종교나 정치 얘기가 아니다. 더 무서운 것. 취향이다.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것들의 목록 1. 와인: 가격이

By 주중몽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