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테일의 꼬리가 머리를 삼켰다: 크리스 앤더슨이 못 본 2025년

롱테일의 꼬리가 머리를 삼켰다: 크리스 앤더슨이 못 본 2025년

롱테일의 꼬리가 머리를 삼켰다: 크리스 앤더슨이 못 본 2025년

2004년 10월, 와이어드(Wired) 편집장 크리스 앤더슨(Chris Anderson)이 한 편의 기사를 발표했다. 제목은 "The Long Tail". 물리적 매장의 한계를 벗어난 온라인 세계에서는 베스트셀러가 아닌 나머지 98%의 상품들도 돈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2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예언은 맞았을까?

앤더슨이 맞춘 것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넷플릭스(Netflix)가 2023년 12월에 발표한 "What We Watched" 보고서를 보면, 전체 시청의 99%가 18,214개 타이틀에서 나왔다. 블록버스터(Blockbuster)가 평균 3,000개 타이틀만 진열했던 걸 떠올리면, 이건 혁명이다. 오래된 미국 영화들? 2년간 38억 회나 재생됐다고 넷플릭스가 2024년 2분기 실적발표에서 밝혔다.

아마존(Amazon)은 더 인상적이다. MIT 연구진이 2008년에 발표한 논문 "A Longer Tail?"에 따르면, 동네 서점에서 찾을 수 없는 책들이 아마존 매출의 36.7%를 차지했다. 2005-2006년 데이터였으니 지금은 더 클 거다. 영리한 아마존은 이런 롱테일 상품 대부분을 서드파티 셀러에게 맡기고 15-20% 수수료만 챙긴다. 2023년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서드파티가 전체 물리적 상품의 60% 이상을 판매한다고.

스포티파이(Spotify)는 아예 차원이 다르다. 2024년 "Loud & Clear" 보고서에서 밝힌 바로는, 1억 곡이 넘는 트랙 중 99.99%가 2023년에 최소 한 번은 재생됐다. 0.01%도 재생 안 된 곡이 있다는 게 더 신기할 정도다.

"무한한 선반"의 시대가 진짜로 왔다.

앤더슨이 놓친 것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가 끝이 아니다.

첫째, 추천 알고리즘의 역설
앤더슨은 추천 시스템이 사람들을 다양한 콘텐츠로 안내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2021년 NBER(미국경제연구소) 논문이 밝힌 현실은 달랐다. 알고리즘은 오히려 인기 콘텐츠로의 집중을 강화했다. 틱톡의 For You Page가 대표적이다. 사용자 상호작용 데이터를 분석해 비슷한 것만 계속 보여준다.

둘째, 창작자 경제의 명암
유튜브는 2025년 보고서에서 49만 개 일자리를 창출했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수익은 상위 크리에이터에게 집중된다. 서브스택도 마찬가지다. 2025년 기준 50명 이상이 연 100만 달러를 번다지만, 나머지 수만 명은? 글쎄.

셋째, 선택 과부하는 과학이다
심리학 연구들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현상이다. 옵션이 너무 많으면 사람들은 선택을 포기한다. 넷플릭스 사용자들이 평균 18분을 브라우징하다 결국 익숙한 시트콤을 선택한다는 2023년 Nielsen 조사가 이를 뒷받침한다.

진짜 승자는 플랫폼이었다

물리적 제약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게이트키퍼가 등장했다.

알고리즘이다.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은 썸네일 A/B 테스트를 하고, 제목에 특정 키워드를 넣고, 영상을 8-12분으로 맞춘다. 왜? 알고리즘이 좋아하니까. 스포티파이 아티스트들은 곡을 2분 30초로 줄인다. 왜? 스트리밍 횟수를 늘리려고.

블록버스터의 선반 대신 알고리즘의 추천란에 갇혔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비관론만 늘어놓을 일은 아니다.

임영웅을 보라. 트로트라는 "구시대 장르"가 유튜브를 만나 40억 뷰를 찍었다. 네이버웹툰과 카카오페이지에서는 이세계물, BL 같은 초니치 장르가 억대 매출을 올린다.

80년대 일본 시티팝이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부활했고, 83세 유튜버가 요리 채널로 100만 구독자를 모았다.

롱테일은 죽지 않았다. 형태가 바뀌었을 뿐이다.

2025년의 교훈

크리스 앤더슨은 한 가지를 놓쳤다. 인간은 탐험가이기 전에 사회적 동물이다.

무한한 선택 앞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남들이 보는 걸 본다. 다만 그 "남들"이 알고리즘이 정의하는 "비슷한 취향의 사용자들"로 바뀌었을 뿐.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20년 전엔 아예 기회조차 없었던 콘텐츠들이 이제는 최소한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 비록 그 누군가를 찾는 건 알고리즘의 몫이지만.

롱테일의 약속은 "모든 것이 팔린다"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다"였다. 그리고 그 약속은, 불완전하지만, 지켜졌다.


추신: 크리스 앤더슨은 지금 드론 회사를 운영한다. 최근 인터뷰에서 "하늘에도 롱테일이 있다"고 했다던데. 뭐, 드론도 결국 알고리즘이 날리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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