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은 쓰레기다 - 36번 실패한 만화가의 고백

열정은 쓰레기다 - 36번 실패한 만화가의 고백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회사원을 그리는 만화가가 있다. 안경 쓴 엔지니어 딜버트는 매일 무능한 상사에게 시달리고, 의미 없는 회의에 참석하며, 영혼 없는 큐비클에서 하루를 보낸다. 그런데 이 만화를 그리는 스콧 애덤스(Scott Adams)는 정작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중 하나입니다."

36번 사업에 실패한 사람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은 아니다.

열정은 쓰레기다

2015년, 스콧 애덤스의 책이 한국에 출간됐다. 제목이 도발적이었다: "열정은 쓰레기다."

자기계발서 코너에서 "열정을 가져라!"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를 외치는 책들 사이에 끼어있는 이 책은 마치 교회에서 "신은 없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출판사도 난감했나 보다. 원제 "How To Fail At Almost Everything And Still Win Big"(거의 모든 일에 실패하고도 크게 성공하는 법)을 의역한 건 좋았는데, 너무 과격했던 걸까. 9년 후 개정판은 얌전하게 "더 시스템"으로 나왔다.

하지만 구버전 제목이 진짜 핵심이었다. 열정은 정말로 쓰레기였으니까.

열정의 역설

스콧 애덤스는 묻는다:

"성공한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보이는 건, 열정이 있어서 성공한 걸까요? 아니면 성공해서 열정적으로 보이는 걸까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질문이지만, 그의 경험은 명확했다. 실패한 사업 36개 모두에 열정을 쏟았다. 결과? 36번의 참패.

반면 딜버트는? 그저 재미로 그린 낙서였다. 열정 제로. 근데 이게 대박이 났다.

"열정은 성공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실패 수집가의 일기

그의 실패 목록은 화려하다:

  • 명상 비디오 사업 (망함)
  • 컴퓨터 게임 개발 (망함)
  • 테니스 레슨 사업 (망함)
  • 식품 사업 (망함)
  • ...그리고 32개 더

보통 사람이라면 10번째쯤에서 "난 안 돼"라고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실패를 다르게 봤다.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데이터였다.

"이 방법은 안 통하는구나. 좋아, 다음!"

마치 게임하듯이. 죽으면 리스폰해서 다른 루트를 시도하는 것처럼.

실패의 품격

스콧 애덤스는 실패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나쁜 실패: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실패

좋은 실패: 다음에 써먹을 수 있는 실패

그의 36번 실패는 모두 '좋은 실패'였다. 식품 사업에서 배운 유통 지식, 컴퓨터 게임 개발에서 배운 프로그래밍, 실패한 만화들에서 배운 독자 심리...

이 모든 게 딜버트에 녹아들었다. 마치 재료를 모으는 RPG 게임처럼. 실패할 때마다 인벤토리에 뭔가가 쌓였다.

"성공은 실패의 잔해 위에 세워집니다. 잔해가 많을수록 건물은 높아지죠."

한국식 열정 vs 미국식 시스템

흥미로운 건 한국 출판사의 고민이 보인다는 거다.

2015년 "열정은 쓰레기다"는 제목은 한국 독자들에게 충격이었다. 우리는 "하면 된다" "해야만 한다"의 나라 아닌가. 노력과 열정이 미덕인 사회에서 "열정은 쓰레기"라니.

그래서일까. 2024년 개정판은 안전하게 "더 시스템"으로 나왔다. 하지만 내용은 여전히 과격하다:

"열심히 노력하는 당신이 항상 실패하는 이유"

한국인들이 유독 번아웃에 시달리는 이유가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시스템이 아니라 열정으로, 과정이 아니라 목표로, 지속가능함이 아니라 단기 전력투구로 살아왔으니까.

농담 반, 진담 반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 가장 낙관적인 철학을 전파하는 것도 아이러니다. 어쩌면 그는 매일 직장의 부조리를 그리면서, 그 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시스템을 만든 건지도 모른다.

딜버트가 큐비클에 갇혀 있는 동안, 스콧 애덤스는 자유롭게 실패하고 있었다. 36번이나.

"열정은 쓰레기다"가 "더 시스템"으로 바뀐 것도 일종의 교훈일까?

도발적인 제목으로 주목받기(열정) vs 꾸준히 읽히는 책 만들기(시스템)

어쩌면 출판사도 스콧 애덤스의 가르침을 따른 건지도 모른다.

열정에 불타는 사람들은 늘 실패를 두려워한다.

시스템을 가진 사람들은 실패를 즐긴다.

그 차이가 36번의 실패를 견딜 수 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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