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성은 어디로 갔을까 - 테슬러 법칙(Tesler's Law)

복잡성은 어디로 갔을까 - 테슬러 법칙(Tesler's Law)
Photo by John Barkiple / Unsplash

리모컨이 단순해질수록 TV 설정 메뉴는 복잡해진다. 앱 인터페이스가 깔끔해질수록 개발자의 코드는 더러워진다. 고객 상담이 친절해질수록 상담원의 매뉴얼은 두꺼워진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제록스(Xerox) 연구원이었던 래리 테슬러(Larry Tesler)가 발견한 법칙 때문이다. 그가 말한 "복잡성 보존 법칙"은 간단하다: 모든 시스템에는 줄일 수 없는 최소한의 복잡성이 있고, 이 복잡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뿐이다.

스타벅스를 보자. 고객은 "아메리카노 하나"만 말하면 된다. 하지만 바리스타는 원두 종류, 추출 시간, 물 온도, 컵 사이즈를 모두 기억해야 한다. 고객의 단순함을 위해 바리스타가 복잡성을 떠안은 것이다.

아이폰도 마찬가지다. 홈 버튼 하나로 모든 게 해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십 개의 제스처와 설정이 숨어있다. 애플은 복잡성을 표면 아래로 밀어 넣었을 뿐이다.

테슬러는 "복사하기-붙여넣기" 기능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사용자는 간단한 단축키 두 개만 알면 되지만, 컴퓨터는 메모리 관리, 데이터 형식 변환, 클립보드 동기화 등 수많은 작업을 처리한다. 우리의 편의를 위해 기계가 복잡성을 감당한 셈이다.

문제는 복잡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착각할 때 생긴다. 카카오톡 메시지 하나 보내는 게 얼마나 쉬운가? 하지만 그 뒤에서는 서버 수백 대가 돌아가고, 개발자들이 밤새 코드를 고치고, 데이터센터가 열을 식히느라 바쁘다.

좋은 디자인은 복잡성을 올바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사용자가 감당하기 어려운 복잡성은 시스템이 가져가고, 시스템이 처리하기 어려운 판단은 사용자에게 맡긴다.

그런데 가끔은 복잡성을 잘못된 곳으로 보내기도 한다. 회사 인트라넷이 "사용자 친화적"이라며 메뉴를 줄였더니, 정작 필요한 기능을 찾으려면 7번의 클릭이 필요해졌다. 복잡성이 개발자에서 사용자로 고스란히 넘어온 것이다.

테슬러 법칙이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복잡성은 마법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 또는 어딘가가 그 복잡성을 떠안을 뿐이다.

결국 중요한 건 이 질문이다: 누가 복잡성을 감당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가?


추신: 이 글을 읽기 위해 당신이 한 일은 스크롤 몇 번뿐이다. 하지만 그 뒤에서는 수백 줄의 코드, 수십 개의 서버, 수천 명의 개발자가 움직였다. 복잡성은 언제나 어딘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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