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건드리면 안 되는 것들: 취향 전쟁의 지뢰밭

누군가 레딧에 "5만원 와인도 충분히 맛있다"고 썼다가 댓글 300개가 달렸다. 대부분 "와인을 모르시네요"로 시작하는 친절한 교육이었다.
인터넷에서 글 쓰다 보면 깨닫는다. 건드리면 안 되는 성역이 있다는 걸. 종교나 정치 얘기가 아니다. 더 무서운 것. 취향이다.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것들의 목록
1. 와인: 가격이 곧 정답인 유일한 음료
"저는 마트 와인으로도 충분한데요"라고 쓰는 순간, 당신은 미각을 모르는 사람이 된다.
누군가는 반드시 나타난다. 탄닌의 구조, 부케의 레이어, 테루아르의 깊이를 설명하며 당신을 계몽하려 들 것이다.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전문가도 구별 못한다는 연구 결과를 링크해봤자 소용없다. "제대로 된 전문가가 아니었겠죠"가 답변이다.
부르디외가 이걸 뭐라고 했더라. 아, 구별짓기(Distinction). 와인은 마시는 게 아니라 계급을 확인하는 도구란다.
2. 시계: 시간을 보는 게 아니라 통장을 보는 것
"애플워치가 더 기능 많은데"라고 썼다가는 큰일난다.
"그건 시계가 아니라 가젯입니다"부터 시작해서 "진정한 시계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 강의를 듣게 될 거다. 롤렉스(Rolex) 대기 2년이 자랑이고, 파텍 필립(Patek Philippe)은 아들에게 물려주는 거란다.
샤오미 밴드로도 심박수 재고 시간 보는데 지장 없다고? 당신은 이미 "시계를 모르는 사람"으로 분류됐다.
3. 커피: 스타벅스는 커피가 아니래요
"아메리카노면 충분한데"라고 쓰면 안 된다.
스페셜티, 싱글 오리진, 로스팅 포인트, 추출 온도. 커피 하나 마시는데 박사 학위가 필요한 시대. 핸드드립 안 하면 커피 애호가도 아니고, 그라인더 없으면 대화 상대도 아니다.
믹스커피 맛있다고? 인터넷에선 그런 말 하면 안 된다. 커피를 모르는 사람 취급받는다.
4. 오디오: 음악이 아니라 주파수를 듣는 사람들
"에어팟으로도 잘 들리는데"는 금기어다.
누군가는 반드시 나타나 하이파이(Hi-Fi)의 세계로 당신을 인도하려 할 것이다. 앰프, DAC, 임피던스. 음악 듣는 게 아니라 장비 자랑하는 건가 싶지만, 그들에게 음악은 장비를 테스트하는 도구일 뿐이다.
유튜브 뮤직으로 듣는다고? "무손실 음원도 안 들어보고 음악을 논하다니"라는 한탄이 들려온다.
5. 자동차: 현대차 타면 안 되나요
"소나타도 좋던데"라고 썼다가는 자동차를 모르는 사람이 된다.
누군가는 독일차의 주행 감성을 설명하고, 누군가는 일본차의 내구성을 역설한다. 테슬라는 자동차가 아니라 바퀴 달린 아이패드라는 사람도 있다.
국산차로 충분하다고? "한 번도 제대로 된 차를 안 타보셨군요"가 기본 반응이다.
6. 골프: 스크린은 골프가 아니래요
"스크린 골프도 재밌던데"라고 쓰면 안 된다.
필드를 밟아야 진짜고, 멤버십이 있어야 골퍼고, 캐디가 있어야 제대로 된 라운딩이란다. 퍼블릭 코스? "그것도 골프장이긴 하죠"라는 미묘한 반응.
파크 골프는 어떠냐고? 그건 질문조차 하면 안 된다.
7. 카메라: 폰카로 충분한데 왜
"아이폰 카메라도 좋은데"라고 쓰는 순간 당신은 사진을 모르는 사람이다.
풀프레임, 센서 크기, 보케, 계조. 사진 찍는 게 아니라 스펙 자랑하는 건가 싶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건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건데 폰카로 충분하다고? "예술을 모르시는군요"가 답이다.
부르디외가 웃고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취향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계급의 표식이라고.
'아비투스(Habitus)'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붙였다. 몸에 밴 계급 의식. 와인을 마시는 방식, 시계를 고르는 기준, 커피를 내리는 방법. 이 모든 게 "나는 당신과 다릅니다"를 말하는 방식이라는 거다.
인터넷은 이 구별짓기를 극대화했다. 레딧 서브레딧, 유튜브 전문 채널,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각자의 왕국에서 각자의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을 모르는 사람을 교육시키려 든다.
그런데 반대편도 만만치 않다
재밌는 건, "비싼 건 다 허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똑같이 극성이라는 거다.
"롤렉스나 세이코나 똑같아"라고 하면서 롤렉스 찬 사람을 호구 취급하고, "와인은 다 똑같은 포도주"라며 와인 애호가를 속물로 몬다. 이것도 일종의 르상티망(ressentiment) 아닐까.
니체가 말한 그 원한의 감정. 가질 수 없으니 가치 없다고 우기는 것. "신 포도"를 외치는 여우처럼.
이들도 나름의 구별짓기를 한다. "난 속물이 아니야", "난 현명한 소비자야", "난 자본주의에 속지 않아". 근데 이것도 결국 "나는 당신들과 달라"를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후계자들의 탈출구
부르디외의 후계자들은 그래도 희망을 찾았다.
베르나르 라히르(Bernard Lahire)는 "다중 아비투스"를 말한다. 한 사람이 여러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는 거다. 낮에는 와인 동호회에서 그랑크뤼를 논하고, 밤에는 편의점 와인 마시며 넷플릭스. 이게 모순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거다.
미클로스 하다스(Miklós Hadas)는 '복수 아비투스'로 더 나아간다. 폴로 치면서 막걸리 마시고, 페라리 타면서 김밥천국 가는 게 이상한 게 아니라는 거다.
로익 와캉(Loïc Wacquant)은 '반성성(reflexivity)'을 강조한다. "왜 내가 이걸 부끄러워하지?"라고 자문하는 순간, 상징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거다.
결론: 로스차일드가 아닌 우리들
진실을 말하자면, 우리 중 누구도 로스차일드(Rothschild)가 아니다.
100만원 와인 마시는 사람도, 500만원 시계 찬 사람도, 1억짜리 카메라 든 사람도. 로스차일드가 보면 다 똑같은 서민이다. 그들은 와이너리를 사지, 와인을 사지 않는다. 시계 회사를 사지, 시계를 사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인터넷에서 5만원이냐 50만원이냐로 싸운다. 세이코냐 롤렉스냐로 계급을 나눈다. 스타벅스냐 블루보틀이냐로 교양을 재단한다.
"비싼 게 좋은 거야"파와 "다 똑같아"파가 싸우는 동안, 진짜 부자들은 조용히 자산을 늘린다.
인터넷에서 소비 얘기하는 게 피곤한 이유가 여기 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구별짓기를 해도, 위에서 보면 다 거기서 거기다.
그러니 제안한다. 소비 얘기는 그만하자. 와인이든 시계든 커피든, 각자 좋은 거 즐기고 남 건드리지 말자. 어차피 우리 다 로스차일드 미만 잡이니까.
진짜 부자는 인터넷에서 취향 논쟁 안 한다. 뭘 하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그들도 넷플릭스 보고 있을 거다.
아, 잠깐. "그 시간에 생산적인 걸 하자"고 하려다가 멈췄다. 이것도 또 다른 구별짓기더라.
부업충들의 "시간은 돈이다", 자기계발러들의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마라", 생산성 덕후들의 "노션으로 인생을 관리하라". 이것도 결국 "난 너희들과 달라"의 변주곡.
마법의 주문: "아, 그러시구나"
사실 해답은 간단하다. 인정이다.
누가 "난 1만원 와인이 좋아"라고 하는데 굳이 "그건 진짜 와인이 아니야"라고 상징폭력을 가할 필요가 뭔가.
누가 "100만원짜리 시계 샀어"라고 하는데 "3만원짜리도 시간 잘 보여주는데"라고 훈계할 이유가 뭔가.
누가 아비투스니 구별짓기니 용어를 쓰는데 "어려운 말 쓰지 마"라고 반지성주의자처럼 굴 필요가 뭔가.
굳이 정의를 구현해야 하는 상황도 아닌데.
그냥 이렇게 하자. "아, 그러시구나."
이 여섯 글자면 충분하다. 5만원 와인? 아, 그러시구나. 롤렉스 대기 2년? 아, 그러시구나. 믹스커피가 최고? 아, 그러시구나.
남의 취향에 논평하지 말자. 남의 소비를 재판하지 말자. 남의 선택을 교정하지 말자.
"아, 그러시구나"를 입에 붙이자. 이게 진짜 구별짓기를 넘어서는 방법이다.
어차피 우리 다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간다. 그때까지 각자 좋은 거 즐기면서, 남 건드리지 말고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