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갑자기 다들 F1 F1 하는가

왜 갑자기 다들 F1 F1 하는가

카페에서 옆 테이블 대화가 들린다. "주말에 F1 봤어?" 인스타그램엔 모나코 그랑프리 스토리가 넘쳐난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막스 페르스타펜 하이라이트를 추천한다.

이상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F1은 아무도 안 보는 스포츠였다. 케이블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유럽 부자들이나 보는 그런 거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20대가 샤를 르클레르를 안다고 하고, 30대가 레드불 팀 정치를 논하는가?

숫자로 보는 이상 현상

2017년 미국 F1 시청자는 NFL 한 경기의 3%도 안 됐다. 2024년? 평균 108만 명이 본다. 신규 팬의 40%가 여성이고, 62%가 35세 이하다.

더 이상한 건 이들이 레이싱을 좋아해서 보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넷플릭스가 만든 가짜 팬?

2019년, Drive to Survive가 공개됐다. 이건 스포츠 다큐가 아니었다. 리얼리티 쇼였다.

크리스티안 호너와 토토 볼프의 신경전. 다니엘 리카르도의 팀 이적 드라마. 피에르 가슬리의 좌절과 복수. 레이싱? 그냥 배경이었다. 중요한 건 인간관계, 배신, 야망이었다.

사람들은 레이싱을 보러 온 게 아니다. 시속 300km로 달리는 오피스 정치를 보러 온 거다.

스포츠의 틱톡화

F1이 한 일은 간단했다. 스포츠를 15초로 쪼갰다.

팀 라디오에서 욕하는 장면. 피트스톱 실수하는 2초. 샴페인 터뜨리는 순간. 이게 틱톡과 인스타 릴스를 타고 퍼졌다.

사람들은 2시간짜리 레이스를 안 본다. 15초짜리 하이라이트 20개를 본다. 그리고 자신이 F1 팬이라고 생각한다.

부자 스포츠의 역설적 대중화

F1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비싼 스포츠다. 팀 예산 상한선이 1억 4500만 달러. 라스베가스 GP 티켓은 5000달러.

그런데 이 '비싸다'는 게 오히려 매력이 됐다. 인스타그램 시대엔 닿을 수 없는 라이프스타일이 콘텐츠가 된다. 모나코의 요트 파티, 싱가포르의 루프탑 바, 드라이버들의 프라이빗 제트.

사람들은 F1을 보는 게 아니라, F1이 상징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소비한다.

캐릭터 경제학

루이스 해밀턴: 패션 아이콘이자 비건 활동가

막스 페르스타펜: 게임 중독자이자 무뚝뚝한 챔피언

샤를 르클레르: 피아노 치는 모나코 왕자

란도 노리스: 트위치 스트리머같은 밈 제조기

이들은 레이서가 아니다. 캐릭터다. 사람들은 레이싱 실력이 아니라 캐릭터를 팬질한다.

K팝이 아이돌을 파는 것처럼, F1은 드라이버를 판다.

미국화라는 이름의 문화 침공

Liberty Media가 F1을 인수한 건 단순한 기업 거래가 아니었다. 문화 전쟁이었다.

유럽의 귀족 스포츠를 미국식 엔터테인먼트로 개조하는 프로젝트. 진지함 대신 드라마를, 전통 대신 스펙터클을, 순수성 대신 접근성을 선택했다.

미국 GP가 하나에서 셋으로 늘어난 건 상징적이다. 오스틴, 마이애미, 라스베가스. 각각 텍사스의 반항, 플로리다의 허세, 네바다의 욕망을 대변한다.

가짜가 진짜를 잡아먹는다

"진짜" F1 팬들은 불평한다. Drive to Survive가 만들어낸 가짜 드라마, 편집으로 과장된 갈등, 레이싱은 뒷전인 콘텐츠화.

하지만 이미 늦었다. 2024년 F1 매출은 36.5억 달러. 2017년의 두 배다. 스폰서들은 줄을 서고, 도시들은 GP 유치 경쟁을 한다.

가짜 팬이 진짜 돈을 쓴다.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돈이 곧 진실이다.

모든 것의 F1화

2025년, Liberty Media는 MotoGP를 49억 달러에 인수한다. 같은 공식을 적용할 계획이다.

이건 시작일 뿐이다. 모든 스포츠가 F1의 길을 따를 것이다. 경기는 콘텐츠가 되고, 선수는 캐릭터가 되고, 팬은 시청자가 된다.

WWE가 처음부터 옳았던 건가

생각해보면 웃기다. 수십 년간 WWE는 "가짜 스포츠"라고 조롱받았다. 각본이 있고, 결과가 정해져 있고, 선수들은 연기를 한다고.

그런데 2025년, 모든 스포츠가 WWE를 따라하고 있다. F1은 Drive to Survive로 드라마를 만들고, NBA는 선수들의 트위터 싸움을 부각시키고, UFC는 기자회견 난투극을 홍보한다.

빈스 맥마흔이 어딘가에서 웃고 있을 거다. "내가 뭐랬어?"

그래서, 왜 다들 F1 F1 하는가?

F1이 갑자기 재밌어진 게 아니다. 우리가 스포츠를 소비하는 방식이 바뀐 거다.

2시간 집중해서 경기 보기엔 너무 바쁘다. 하지만 15초짜리 클립 20개는 볼 수 있다. 규칙을 외우기엔 너무 복잡하다. 하지만 누가 누구랑 싸웠는지는 기억한다. 기술적 디테일은 모른다. 하지만 드라이버가 어떤 시계를 차는지는 안다.

F1은 이 시대가 원하는 걸 정확히 줬다. 짧고, 드라마틱하고, 인스타그래머블한 스포츠.

2025년의 진실: 모든 게 콘텐츠다

"콘텐츠가 아니면 팔지 못한다"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만, 이미 현실이다.

커피숍도 인스타그래머블하지 않으면 망한다. 레스토랑도 틱톡에 안 나오면 손님이 없다. 심지어 장례식장도 '스토리텔링'을 한다.

스포츠라고 다를까? F1의 변신은 시작일 뿐이다.

다음에 누군가 "F1 봤어?"라고 물으면, 한 번 생각해보자. 그들이 정말 본 건 F1일까, 아니면 F1이라는 포장지를 두른 리얼리티 쇼일까?

어쩌면 그 구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미 우리 모두가 Drive to Survive의 엑스트라가 된 세상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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